사는게 뭔지 혼자 살자니 외롭고, 식구가 되어 같이 살자니 괴로운게 인생인가? 친구일 경우엔 안보면 그만이지만 식구는 그럴 수가 없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고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어 있다. (잠18)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잠19) 친구를 가지려면, 사람들과 척을 지지 않고 그들에게 언젠가 물 한그릇이라도 얻어 먹는 도움을 받으려면 너그러워야 한다. 너그럽지 않으면 친구를 갖기 힘드니 왜냐하면 세상엔 무정하고 냉정한 사람들이 모래알처럼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탐욕 투성이의 더러운 자국들이 보인다. 탐욕은 가정에서 불만과 알력을 조장하고 가난한 자로 하여금 부자에 대하여 질투와 증오를 일으키게 하고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포학한 압박을 가하도록 한다." (부조497) 나는 정이 그리운데 사람들은 정이 그리운것 같지가 않다. 나는 혼자 살기가 외로운데 사람들은 말없는 인간처럼 혼자 사는데 익숙한것 같다.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 (정이 많은 자)를 거리에서나 큰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길거리에 다니는 그 누구도 나에게 정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모두에게 너무 친절하다는 점 등 아주 사소한 것들에 대한 것까지 계산적으로 보인다며 비판받아야 했다." (최나경 참조)
지금은 요나가 왜 그랬는지 알것 같다. 옛날엔 성경에서 요나서를 읽으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지자란 사람이 어떻게 남의 집 불구경 하듯이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할수 있단 말인가? 요나는 모세처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고 (민12:3)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었다. (욥1:8) 그런 사람이 어느날 혼인 잔치를 하고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처로 가고" 하나는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왔다.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초청한 사람을 함부로 막 대하고 성의가 없다는 증거요, 잔치에 마지 못해 왔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설날이나 추석 잔치에 오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고, 또 마지 못해 무성의하게 오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싶지 않겠는가? (마22)
모정 밖에는 세상에 정이 없다
-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 무정하고 냉정한 사람이 너와 거리를 두듯이 너도 그와 거리를 두고 살아라. (잠25:17) 이웃 사촌이라고 하지만 무정한 세상에선 이웃끼리 왕래하는 것도 없다. 오로지 가족끼리만 왕래를 하는데 가족의 구심점이 어머니에게 있다. 가수 이장희가 친구들을 초대하는 너그러움이 있기 때문에 세시봉 친구들이 몇십년 우정을 유지하듯이 어머니가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명절날 형제들이 모이는 것이다. 만일 이장희의 너그러움이 없으면 친구의 우정도 없고, 어머니의 사랑이 없으면 형제의 우애도 없다. 명절이 끝나면 자녀들은 떠나가니 어머니의 사랑은 짝사랑이다.
설날이나 추석에 어머니는 자식들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자식들은 오질 않는다. 찾아가면 귀찮아 하고, 전화하면 받지를 않는다. 왜 모정 밖에는 세상에 정이 없는 것일까? 개나 고양이가 자기를 예뻐해달라고 사람들에게 비비적거리면 사람들은 쓰다듬어 주지 않고 오히려 귀찮다고 차버린다. 이처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24:12) 세상이 너무 이기적이므로 자기가 먹을 것을 남에게 주던 정많던 사람 까지도 사랑이 식어진다. 사랑을 베풀며 느끼는 봉사의 기쁨은 완전하게 일을 마치는 것처럼 사람에게 커다란 만족을 주는 것이요, 안하고 싶어도 안할수 없을 만큼 몸에 배인 습관이지만 서서히 점점 짝사랑을 하기가 싫어진다.
닭날개와 생선 대가리를 먹고 가슴살은 자녀에게 주는 어머니의 사랑이 무한하고 위대하다 하지만 꼭 그런것 같지만은 않다. 세상에서 흔히 보는 편 가르기 (편애)와 왕따는 가족 안에도 있다. 시대의 소망 33장에 보면 주의 모친과 형제들도 편 가르기를 하면서 모두 합세해 주를 구타하였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자녀에게도 절대로 양보 못하는 이기심과 탐욕이 부모에게도 있다. 탐욕 때문에 견고한 성에다 재물을 숨기고 하직하는 부모가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잠10:15)
야곱의 외삼촌처럼 미련한 사람은 혼자 일하려 들다가 사업체를 말아 먹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내가 30분동안 비를 맞고 걸어가서 일을 해주기는 죽기 보다 싫다.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이러면 둘 다 망한다. 야곱처럼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지만 한푼도 안주고 일을 시키다가 불화로 일꾼이 떠나면 그냥 사업체를 버린다. 자동차도 혼자만 타고 다니다 세월이 지나면 그냥 헐값에 팔아 버린다. 이렇게 사업체나 중고차를 버리거나 헐값에 파느니 차라리 그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에게 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일이 없어 궁핍한 사람이 사업체를 운영하며 혼자 일을 도맡아 할수도 있고 아니면 일꾼을 고용해서 시간당 10불씩 적절한 임금을 주고 나머지 수익을 챙길 수도 있을 것이다. 가게를 떠나서 내가 덴버에서 Ready 일용직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집이 있었다면 두번씩이나 하와이에 가서 텐트를 치고 못된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20년의 시간을 자기를 위해 쓴다면 야곱처럼 "공수로 돌려 보내"질뻔한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다. (창31:42) 가게를 떠나서 내가 덴버에서 Ready 일용직을 했을 때처럼, 그리고 2014년 2월처럼,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살기 때문에 모두를 위해 야곱이 외삼촌의 집에서 분리를 안한게 좋았던 것일까? 아니다. "이 분리는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하였다. 두 형제는 신앙에 있어서 아주 큰 차이가 있었으므로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이 그들에게 더 좋았다." (부조207) 84같은 불화를 막기 위해선 인정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어떤 때는 세상 사람들 처럼 이기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의 공포시대에 중정에 갇혀 벌벌 떨거나 아니면 떨다가 미칠 지경이 되어 김재규처럼 우발적으로 행동해선 안된다. 그건 그리스도인처럼 순진한 바보나 하는 짓이다. 반면에 전두환처럼 악한 인간은 거사를 철두철미하게 계획했으며 용감하고 단호했다. 군인 장교들의 조직인 하나회를 설립하고 정권을 잡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어쩌면 박정희가 급사하는 것을 이미 예측하고 그때를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뱀처럼 최대한 몸을 낮추고 살다가 때가 되었을때 고개를 쳐들고 적을 물었다. 그러므로 주께서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신 것은 순진한 그리스도인도 독사의 자식들 처럼 지극히 독해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일까?
물론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께서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신 것은 나의 불만을 노출시키지 말고 뱀처럼 은밀하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전라도 사람처럼 남을 속이기 위해 은밀하게 행동하는게 아니라 불화를 막기 위해 은밀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나의 불만을 노출시키는 순간에 뜨거운 여름은 끝나고, 고독하고 추운 [가슴이 시린] 겨울이 시작된다. 나는 이것을 2014년 2월에 아주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주께서 왜 뱀처럼 은밀하게 행동하라 하셨는지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주께선 말씀하셨다. 또한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셨다. 적막강산, 구중궁궐에서 혼자 살 필요는 없지만 무서운게 사람이다. 아무리 외롭고, 고독해도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처럼 굴면 안된다. 사람을 보면 반가워 하면서도 또한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 사단으로 말미암아 눈이 멀어진 부모들은 그 믿는 자녀들을 혹독하고 가혹하게 취급할 것이며 주인과 여주인은 계명을 지키는 하인을 박해할 것이다. 애정은 끊어지고 자녀들은 상속권을 잃고 가정에서 쫓겨날 것이다..... 인간의 지혜로 볼때 지금은 이런 일이 있을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을 제어하고 있는 하나님의 신이 물러가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미워하는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면 이상한 현상이 생기게 될것이다.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사랑이 제거되면 그 마음이 매우 잔인해질수 있다. GC608
형제의 위협과 부모의 편애 그리고 골수까지 찌르는듯한 비난은 나로 하여금 M을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길 가족이 없으면 천국에 가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죄의 쓴맛을 덜 경험한 사람이나 철없이 하는 소리이다. 나는 93년에 집으로 들어와 20년 넘게 온갖 죄의 쓴맛을 겪어 보니 이제는 가족과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과 달리 지금은 왜 주께서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쫓으라"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하셨는지 알것 같다. (마8:22, 12:48)
그러나 Whispering Hope 속삭이는듯한 위로의 음성은 3가지 이유를 나에게 말씀하시면서 M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다. 2014년 2월에 아주 뼈저리게 깨달았다.
- 그리운 어머니 - [강인엽] - [뽀빠이 이상용]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도 나는 어머니를 떠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를 아껴 주고 위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한사람 어머니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물려 받는 재산이 한푼도 없다 해도 나는 어머니와 같이 사는 시간이 억만금 보다 좋아야 한다. 어머니와 같이 살수만 있다면 억만금과도 바꾸고 야곱의 아들 유다처럼 종이라도 될것이다. 비록 편애하고 구박 (비난)하는 습관이 있다 해도 어머니 만큼 누가 나에게 애정을 줄것인가? 그런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천국에 가서 어머니만큼 정많은 사람을 만날때 까지, 내가 죽을때 까지, 나는 어머니를 잊지 못할 것이다. 결혼 서약처럼 죽음 외에는 아무 것도 갈라 놓을 수가 없는 사이가 바로 이것이다. 바울은 말하길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고전7) 사소한 잘못이나 의견 충돌로 저를 버려선 안된다. 주께선 음행한 연고 없이 배우자를 버리지 말라고 하셨지만 바울은 한단계 더 나아가 배우자의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으면 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물론 나에게서 마음이 떠난 배우자나 형제자매는 얼마든지 버릴 수가 있고, 심지어 자녀들이나 아버지 까지도 버릴 수가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서 마음이 떠나지 않은 어머니는 절대로 버릴 수가 없다. 오늘날 수많은 자식들이 당연하다는듯이 너도 나도 할것 없이 다들 현대판 고려장을 해도 어머니란 존재는 자식을 절대로 버리는 법이 없다. 부모는 땅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가슴에 묻어야 할 사람은 무정한 자식이 아니라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늙어서 자녀에게 버림 받고 고독해봐야 그때서야 사람들은 불효를 깨닫고 쓸쓸하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 할까? - 어머니만큼 나를 사랑하고 위해 주지 않는 아버지는 버릴수 있을까? 세상에는 똑똑한 자식을 자랑하는 아버지들이 많지만 미련한 자식 까지도 품어 주는 사람은 오로지 어머니 밖에 없다.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 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한 것이 헛되게 될찌라도 괘념치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 내가 지혜를 품부하지 아니하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니라." (욥39:13-17) "들개는 오히려 젖을 내어 새끼를 먹이나 처녀 내 백성은 잔인하여 광야의 타조 같도다." (애가4:3) 세상에는 타조같이 매정하고 미련한 아버지가 더러 있다. 자식보다 자동차를 더 소중히 여기고, 자식을 팔아 먹기 까지 한다. 그러나 늙어서 부모가 무력하여진 사실이야말로 자녀들의 사랑을 불러일으켜야 하지 않겠는가?
"한 어머니의 딸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항상 어머니를 미워하였고 어머니는 또 나를 미워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늘 책에 기록되어 각 사람이 그 행위대로 갚음을 받을 심판의 날에 공개되고 폭로될 것이다. 자녀들이 그들이 어렸을 때에 가혹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할지라도 그들의 부모들에 대해서, 특히 그들이 늙어서 연약해졌을 때에 그들에게 보복과 복수를 하겠다는 정신을 품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데에 도움이 되겠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도록 만들겠는가? 부모가 무력하여진 사실이야말로 자녀들의 사랑을 불러일으켜야 하지 않겠는가? 늙은 부모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마음의 고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손들이 친절한 관심과 존경으로 부모를 대접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 부모에 대해서 마음을 강철과 같이 굳게 하지 말지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공언하는 딸이 자기의 어머니에 대해서, 특히 그 어머니가 노환에 걸렸을 때 증오심을 품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 생애에 가장 향기로운 열매인 친절과 사랑이 부모를 향한 자녀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어야 할 것이다." (Manuscript 18, 1891) - "Especially dreadful is the thought of a child turning in hatred
- upon a mother who has become old and feeble,
- upon whom has come those infirmities of disposition attendant upon second childhood.
나는 다윗이 늙어서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주님께 간구할 때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간곡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는지를 보았다. 그는 주변의 노인들이 대부분 행복하지 못한 것과, 특히 나이가 더해 감에 따라 불행한 품성의 특성들이 더해 감을 보았다. 사람들이 천성적으로 close숨기고 탐욕적이면, 나이가 많아질 때 그 성질이 가장 불쾌하게 나타난다. 만일, 그들이 질투심이 많고 fretful까다롭고 참을성이 없으면, 나이가 들면 더욱 더 그러해진다. 다윗은, 왕들과 귀족들이 혈기 왕성한 장년기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이가 들자 가장 절친한 친구들과 친척들을 시기하는 것을 보고 낙망했다. 그들은 친구들이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이기적 동기 때문일 것이라고 계속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마땅히 신임해야 할 자들에 대하여 낯선 사람들이 하는 암시와 기만적 충고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들의 제지당하지 않은 질투는 그들의 쇠약해 가는 판단에 아무도 동의해 주지 않기 때문에 때때로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들의 탐욕은 놀라웠다. 그들은 때때로 자녀들과 친척들이, 그들의 지위를 차지하고 그들의 재산을 소유하고 그들에게 주어졌던 존경을 받기 위하여 죽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자녀들을 죽일 정도로 질투와 탐욕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다윗은 어떤 사람들의 생애가 혈기 왕성한 장년기에는 의로웠지만 나이가 듦에 따라 그들의 자제력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일을 목격했다. 사단이 들어와서 그들의 마음을 지배함으로 그들을 불안하고 불만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나이 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원수들의 조롱과 비난 거리가 되는 것을 보았다. 다윗은 큰 충격을 받고, 그가 나이를 먹어야 할 때를 바라보고 낙담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고, 그가 목격해 온 다른 노인들처럼 그도 불행해지고 주님의 원수들의 조롱거리로 남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이런 부담을 안고 그는 열렬하게 기도를 드린다.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9, 17, 18). 다윗은 늙은 때에 따르는 악에서 보호를 받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정신적 능력이 쇠약해 가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들은 자녀들이 해야 할 염려를 함으로 수명을 단축시킨다. 사단은 빈번히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시켜 그들의 돈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염려하게 한다. 돈이 그들의 우상이므로 그들은 그것을 인색하게 쌓아 둔다. 그들은 가지고 있는 돈을 사용하기는커녕, 때로는 생애의 안락을 빼앗기고 힘에 겨웁게 노동을 한다. 그들은 장차 어느 때에 궁핍해질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이런 모양으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궁핍한 처지에 둔다. 이 모든 염려는 사단에게서 온다. 사단은 심령의 고결함을 부패시키고 고상한 사상과 감정을 파괴시키는 노예적 공포와 시기심을 일으키는 신체의 기관을 자극한다. 그런 사람들은 금전 문제에 대한 정신 이상자들이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위치를 취한다면, 그들의 말년은 가장 훌륭하고 가장 행복한 것이 될 것이다. 정직하고 현명한 처사를 할 만한 자녀들이 있다면, 그 자녀들이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도록 해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단이 그들의 정신적 능력의 결핍을 이용하여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그들은 근심과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할 수 있는 대로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고, 하늘을 위하여 성숙해지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가버나움에서 팔십리 이상 떨어진, 넓고 아름다운 에스드랠론 평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고원(高原)에 나인이라는 동네가 있었다. 예수께서 이번에는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그분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그분과 동행하였으며 내내 그분의 사랑과 긍휼의 말씀을 갈급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도록 데려왔다. 그들은 이와 같이 놀라운 능력을 행사하시는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알리시리라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군중이 그분의 발자취를 따랐는데, 산간 촌락의 성문 쪽으로 뻗은 바위가 많은 길을 그분을 따라서 올라간 무리는 즐겁고 기대에 찬 일행이었다. 그들이 가까이 갈 때 성문에서 장례 행렬이 나오는 것이 눈에 띈다. 그 행렬은 느리고 슬픈 걸음으로 매장지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 선두로 운반되는 열린 관에는 시체가 있고 그 주위에는 곡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통곡 소리가 하늘에 사무친다. 모든 동네 사람들이 고인에 대한 경의와 유가족에 대한 동정을 나타내기 위하여 모인 듯하다. 그것은 동정을 일으키는 광경이었다. 고인은 어머니의 독자였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이 외로운 애도자는 그의 유일한 육신의 의지요 위안인 아들을 뒤쫓아 무덤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과부가 그분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하고 울면서 무턱대고 따라올 때에 그분께서 과부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서 부드럽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곧 과부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키실 것이었지만 이러한 자애로운 동정의 말씀을 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라. 시체를 만지시는 것도 그분을 부정하게 할 수 없었다. 관을 멘 자들이 조용히 섰고 애곡하는 자들의 통곡도 그쳤다. 그 두 무리들이 혹시나 하여 관 주위에 모여 섰다. 질병을 내쫓고 사귀를 정복하신 분께서 임석해 계셨다. 사망도 과연 그분의 권세에 복종할 것인가? 분명하고 위엄 있는 음성으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말씀이 발하여졌다. 그 음성은 죽은 자의 귀를 울렸다. 청년은 눈을 떴다. 예수께서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다. 아들의 시선이 자기 곁에서 울고 있던 어머니에게 머물렀다. 어머니와 아들은 얼싸안고 길고 기쁜 포옹을 하였다. 군중은 마치 넋을 잃은 것처럼 침묵 속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였다. 입을 다문채 경건한 마음으로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있는 것처럼 잠시 서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장례의 대열은 개선의 행렬로 나인성으로 되돌아갔다. "예수께 대한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나인 성문에서 슬퍼하는 어머니 곁에 서 계시던 그분께서는 관 곁에서 슬퍼하는 모든 애곡하는 자를 주목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슬픔에 동정을 느끼신다. 지난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시던 그분의 마음은 변함이 없는 온유한 마음이다. 나도 온유한 마음을 갖자. 황반변성을 앓고 계신 어머니를 떠나 어디로 간단 말인가?